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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2008.04.06

사춘기라는 단어가 정말 그런 뜻이라면 그 단어 너무 우리한테 어울린다.

나에겐 지금보다 더 많은 변화와 많은 선택과 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질 때가 없었으니까.

소설 속 이야기들이 가까운 곳에서 펼쳐지고 영화에 나올 법한 모습들이 내 옆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야기들.

나의달콤한도시도, 자유열전도, 내나이서른하나도 그저 나와는 다른 이야기.였는데.

너무 변해서 나마저 내가 낯설어져버릴까봐.

가진 것도 없는데 잃어버릴까봐.

그럴까봐서.

비가 부슬부슬 왔고 찬 바람이 불었고 귀에선 판타지 같은 음악이 흘렀다.

옷을 여미며 책이 든 가방을 들고 병원을 나선다.

할일을 다 못했고 별로 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은 채 그냥 또 그렇게 휴일을 흘려보내면서.

판타지 같은 음악이 3분 안에 급작스런 우울한 일이 닥칠듯이 마음을 흔들었고 응급실 앞엔 앰뷸런스 녹색 빛이 어지러웠다.

나무가 두줄로 서있는 어두운 길에서 잠깐 서서 생각을 했다.

난 지금 어디서 사는 것인지.

사람들은 무엇을 사는 것인지.

난 숨쉬고 있지만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움직이고 있지만 그들이 정말 살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를 위해 시간을 쓰는 건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를 쓰는 건지

글쎄 서른이 되어도 마흔이 되어도 난 잘 모를 거 같다.




2007.08.17

무슨 위대한 예술가도 아니고 뛰어난 능력은 가진 일인자도 아닌

그저 그런 정말 평범하다 못해 기억조차 안 나는 그런 사람.

약속은 서로를 끼워 맞추는 자물쇠지 열려버리고 풀어져 버리는 열쇠가 아니란 것도 알아.

하지만 이건 너무 하잖아. 넌 세상에서 제일 잘났고 훌륭하겠지만.

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작고 부족해 보여. 그런 약속은 하지 말았어야했어.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런 약속은.


리도케인을 맞은 것처럼 내 살 같지가 않아.

오늘 breast sono보면서 젊은 나이에 cancer op 받고 chemo치는 환자를 보고,

내 몸에도 병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0.1초 만에 지나치더니

만약 내가 일도 못할 정도로 아프면 난 무얼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더랬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의 손을 잡고 영화를 보고 훌륭한 스승님 화실을 따라가서 하루 진종일 그림만 그려보고 싶다. 는 생각.

그렇게 병에 걸린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까도 싶고 하루 종일 그림 그리는 거 무척 어렵다.는 현실적인 생각도 든다.

이래서 인턴은 바보고 1년차는 paranoid인가 보다.

나 아주 전형적인 코스를 밟는 거라고.




2007.11.29

너 좋으라고 나 슬프다.




2008년 11월 20일.

첫눈이 왔어요.

새벽 출근길 검푸른 세상에 따뜻한 눈이 떠다녔어요.

귀에는 길에서 만나다.가 들렸고요.

내 입에서도 체리샴푸 맛이 나더라고요.

병원 직원을 대상으로 검진을 한대서 몸무게를 재고난 기념으로 토피넛 라떼랑 만두방의 라면도 먹었어요.

이곳 안암동엔 좋은 게 많아요.

학생 때 먹던 만두방도 그대로고 혜성분식도 그대로죠. 영철 버거도 있고 비라도 올라치면 두툼한 파전과 고추튀김을 주는 나그네파전도 그대로거든요. 안산에서, 구로에서 그렇게도 그립던 이동네 이곳들을 이제는 점심시간에도 갈 수 있어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대요. 그래서 한 번 변하면 다시는 바뀌지 않는대요.

나에겐 한 번 변하기가 무척 쉽질 않아요. 그래서 고민해봤는데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리면 어떨까요.

꼭 그럴 필요는 없는 건데.

귤과 눈과 따뜻한 고구마 그리고 전혀 반갑지 않은 감기의 계절이 오늘은 몸속까지 와버렸어요.





2008.12.15

요즘 달이 무지 커요.

어제는 둥근 달이 뚝. 떨어질까봐 조심조심 걸었더랬죠.

오후 초음파는 무척 피곤하네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할아버지를 달래서 양쪽 신장을 보고 나면

엉엉 우는 꼬마의 appe를 찾아야하죠.

그뿐이 아니에요.

이틀에 한 번 꼴로 복수를 뽑아주기 위해 관을 꽂아주는 환자도 있어요.

ICU환자는 CRRT 때문에 팔이 길고 몸이 유연해야 portable sono가 보여요.

사실 팔이 짧아서 난 왼쪽 kidney는 침대를 건너가서 보죠.

그치그치 노래를 들으면서 달을 봤어요. 오늘도.

오늘 달은 조금 못생겨졌지만 그래도 어제처럼 뚝. 떨어질 것만 같았거든요.

낯익은 안산에서 컨퍼런스를 마치고 돌아온 지금. 몹시 피곤하네요.

이번주는 저널 발표랑 응급실과의 컨퍼런스가 있답니다.

아 논문도 써야하고 당직도 서야하고 판독 개수도 채워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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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무지 컸어요.

소원을 빌고 싶을 만큼.

소원을 혼자 빌고 말았어요.

그리고 바보처럼 저러고 쪼그려 앉은 거 같아요. 나 아마.




2007.07.17

이미 져버린 꽃은 이런 습한 날씨에 그모습 그대로 마르지 않을거야.

시커멓게 썩어버리겠지.

그모습 그대로 말라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썩어버리는 게 나을지 몰라.

썩어서 사라져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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